카테고리 없음

역사의 기록자들 /인천경기기자협회보 창립52주년 칼럼

원기자 2016. 6. 1. 09:17

<역사의 기록자들>/원현린 기호일보 주필
"항상 진보와 개혁을 위해 투쟁하라. 부당함과 부패를 결코 묵인하지 말라. 언제나 모든 당파의 선동가들과 싸우라. 결코 어떤 당파에도 소속되지 말라. 항상 특권 계층과 공공재산의 약탈에 반대하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연민이 없어서는 안 된다. 항상 대중의 복지에 헌신하라. 단순히 뉴스를 인쇄하는 것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항상 철저하게 독립적이어야 한다. 약탈적인 금권에 의한 것이건, 약탈적인 빈곤에 의한 것이건, 무엇이든 잘못된 일을 공격하는 것을 결코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인용한 위 글은 현대 저널리즘의 창시자로 불리는 ‘조셉 퓰리처’가 평소 언론인으로서의 자세를 강조한 내용이다.
사회부장 시절이다. 필자는 눈비가 내리는 날이면 기자들에게 "오늘은 우중명절(雨中名節)이니 한잔 해야지"하곤 인천 신포동 골목 대폿집에 걸터앉아 소주잔을 드날리며 소위 ‘기자정신’에 대해 장황설을 늘어놓곤 했다.
갓 입사한 신참기자들도 있어 들려줄 이야기도 많았다. 퓰리처가 남긴 갖가지 일화가 늘 안주를 대신하곤 했다.
퓰리처의 여러 이야기 가운데 필자가 자주 인용하는 말이 있다. "나는 경찰이든 아니면 다른 곳이든, 공공서비스 부문의 잘못에 대해서는 무엇이든 공격하고 싶다. 나는 신문이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가르치는 도덕교사라고 믿는다. 신문은 반드시 사회에 참여해야 한다. 만약 신문이 형세를 관망하며 중립적인 태도를 취한다면 나는 무덤 속에서도 돌아누울 것이다. 신문은 반드시 대중 여론을 이끌어야 한다."가 그것이다.
신문의 사명을 단적으로 나타낸 말이라 사료된다. 신문 종사자들이 좌우명으로 삼기에 부족함이 없을게다.
퓰리처가 전 생애를 통해 일관되게 견지했던 ‘3계명’, 즉 ‘정확·간결·끈기’는 오늘날까지도 기자들에게 ‘기사작성의 지침’이 되고 있다.
‘사회의 굽은 곳을 펴고 막힌 곳을 뚫겠노라!’하고 기자가 된 필자다. 지금도 혹간 후배 기자가 "바람직한 기자 상이 무엇입니까?"하고 물으면, 앞서 살다간 선배 언론인들이 설파한 이 같은 명언들을 예로 들어가며 답을 대신하곤 한다.
가뜩이나 어려운 오늘날의 언론 상황이다. 때문에 후배들에게 언론의 사명감을 불어 넣어 기자정신으로 무장시키려는 필자의 의도도 있었으리라.
퓰리처는 언론인의 역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다리 위에서 국가라는 배를 감시하는 것, 감시자는 그 배의 지나가는 돛과 좋은 날씨 속에서 수평선 위에 점으로 보이는 자그마한 관심거리들을 기록한다. 그는 그 배가 구해줄 수 있는 표류자들을 보고한다. 그는 안개와 폭풍을 뚫고 앞을 응시하면서 앞에 놓인 위험을 경고한다. 그는 자신의 임금이나 자신을 고용한 사람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을 믿는 사람들의 안전과 안녕을 지켜주기 위해 그곳에 있다."
역사의 기록자들을 운운하면서 중국의 사가(史家) 사마천(司馬遷)을 빼 놓을 순 없다.
한무제(漢武帝)의 노여움을 사서 억울하게 궁형(宮刑)을 당하는 굴욕까지 감내했던 역사가 사마천은 황실과 무제에 대해서까지도 비판의식을 견지했다. 그는 권력층의 부정과 사회부패상을 결코 지나치지 않고 신랄하게 지적, 역사에 남겼다.
사마천은 죽음보다 더한 치욕적인 형벌을 당하면서도 참고 살아있는 이유는 오직 역사의 기록을 후세에 남겨야 한다는 일념에서였다고 그의 벗 임안(任安)에게 보낸 한 통의 편지에서 술회하고 있다.
"어찌 뇌옥(牢獄)에 갇히는 치욕 속에 그저 빠져 있을 수만 있겠습니까? 미천한 노복이라도 자결하고자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은인하며 살아남아 분토(糞土) 속에 갇힌 것 같은 지금의 처지를 참고 있는 것은 마음속에 맹세한 일을 완성하지 못한 것이 유감스럽고, 이대로 죽어서는 내 문장(文章)이 후세에 전해지지 않을까 애석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사마천은 52만6천500자에 달하는 불후의 사서(史書) ‘사기(史記)’를 완성했다.
무디어진 펜으로는 정확하고 간결한 비판의 기사를 쓸 수가 없다. 그렇다면 그 펜은 이미 기자의 펜이 아니다. 새로운 시간위에는 새로운 역사가 쓰여 져야 한다. 신문보다 더 정확한 사서(史書)는 없다.
오늘도 역사의 기록자로서 격동의 역사현장에서 청춘을 다 바치고 있을 경인지역 기자들에게 열광과 갈채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