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향 잃은 국정, 향도자(向導者) 역할을]
[방향 잃은 국정, 향도자(向導者) 역할을]/경기저널(봄호) 원현린 기호일보 주필
지역 언론의 역할과 사명이 크다. 내 지역살림은 내가, 우리 손으로 하자 하여 시행된지방자치제도다. 각 지역이 처한 실정이 다를것이다. 환경에 따라 문화도 차이가 난다. 지역 특성에 맞는 환경을 조성해가며 지역문화창달에 앞장서야 하겠다. 지방자치가 부활한 지 30년이 넘었다. 이립(而立)의 나이를 훌쩍 넘겼다. 윤석열 대통령은 최근 ‘제3회 중앙지방협력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정부는 진정한 지방시대를 열기 위해 중앙의 권한을 과감하게 이관하고… 성장 동력을 발굴하고 키워나갈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고 말했다.지방정부가 언제까지 중앙으로부터의 탈피, 독립만을 외칠 수는 없다.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별반 진전되지 않았지만 여건만을 탓할 것이 아니다.언론을 중앙언론과 지방언론으로 나누는 용어는 맞지 않는다고 본다.내가 발붙이고 사는 곳이 바로 중앙이요, 중심이다.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이라 했다. 자신이 머무는 곳의 주인이 되어라, 그러면 그곳이 진리라는 말이다.
제한된 지면이지만 언론의 사명과 역할에 관해 약술해 본다.역사(歷史)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했다. 역사는 기록이다. 기록이 없으면 역사도 없다. 기자(記者)는 역사의 기록자이다. 기자는 단순기록자를 넘어 국정을 감시, 비판하는 역할을 한다. 때문에 언론을 일컬어 입법·행정·사법부에 이어 제4부라 칭하기도 한다. 혹자들은 ‘무관의 제왕’이라고까지 추켜세운다.이처럼 기자의 사명은 막중하다. 기자라면 이러한 명성에 걸맞은 노릇을 해야 한다. 무거운 사명감을 지녀야 한다는 얘기다. 사후(死後)에도기록(記錄)은 남겨진다.훗날 역사를 의식하여, 죽음보다 더한 치욕적인 궁형(宮刑)에 처해지면서까지 붓을 놓지 않고 불후(不朽)의 사서(史書), ‘사기(史記)’를 완성한사성(史聖) 사마천(司馬遷)을 소환해 본다. 그는 벗 임안(任安)에게 보낸 편지에서 “뇌옥에 갇히는 치욕 속에 그저빠져 있을 수만 있겠습니까? 미천한 노복(奴僕)이라도 자결하고자 할 것입니다. 더구나 궁지에 몰린 내가 살아남아 분토(糞土) 속에 갇힌 것 같은 지금의 처지를 참고 있는 것은, 마음속에 맹세한 일을 완성하지 못한것이 유감스럽고, 이대로 죽어서는 내 문장(文章)이 후세에 전해지지 않을까 애석(哀惜)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구구절절(句句節節) 마음을 숙연하게 하는 문구들이다.언론의 역할 중 가장 대표적 기능이 감시기능(watch dog)이라 하겠다.민주국가의 언론이라면 감시의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이러한 감시자로서의 언론의 역할을 잘 표현한 언론인이 있다. 현대 저널리즘의 창시자로 불리는 조지프 퓰리처는 “언론은 다리 위에서 교량 밑을 통과하는 국가라는 배가 교각에 부딪히지 않고 온전히 항해하는지 감시하는 자”라했다.
언론은 이처럼 국정이 흔들리거나 방향을 잃었을 때 향도자(向導者) 역할도 한다.
그러잖아도 언론에 대한 불신이 팽배한 작금이다. 이 같은 못미더움은언론 스스로가 키웠다고 본다. 사소한 사건을 침소봉대(針小棒大)하여빅뉴스로 다룬다던가, 진실만을 보도치 않고 선정성을 자극하여 가짜뉴스를 양산하는 행위 등이 오늘날 언론에 대한 불신을 조장했다는 사실을부인할 수 없다.
근자 들어 SNS 유튜브의 발달로 저널리즘의 지형이 급격히 변화하고있다. 특히 종이신문의 독자가 줄기 시작한 지는 이미 오래다. 지역 언론의 경우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고 하겠다. 잘못된 통치행위에 대한 감시와 비판,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고 매진해 나갈 때 언론의발전을 도모할 수 있다고 본다.날로 쇠퇴해가는 지역 언론을 활성화하기 위한 학술대회, 세미나 등이왕왕 열리고 있으나 뾰족한 답은 도출되지 않고 있다. 언론 스스로가 남다른 각오로 구래(舊來)의 사슬에서 벗어나 혁신(革新)을 이루어야 하겠다. 일반 기업들도 ‘고객 만족’을 넘어 ‘고객 감동’을 불러일으키지 않으면살아남기가 어렵다고 한다. 그러려면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날마다 새롭게 하고 또 새롭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물며 언론에 있어서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