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현린 칼럼
그것은 이미 효(孝)가 아니다
원기자
2012. 10. 2. 10:50
그것은 이미 효(孝)가 아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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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도 효(孝)자는 늙을 로(老)자와 아들 자(子)자의 의 합성어다. 노인을 자식이 업고 있는 형상이다. 부모를 잘 봉양하고 모신다는 의미다. 이태 전으로 기억된다. 경로주간을 맞아 ‘세 걸음도 못 걷고 울었다.’는 제하에 효를 거론한 적이 있다. 그때 필자는 ‘늙으신 어머니를 업어보고 그 너무 가벼움에 세 걸음도 못 걷고 울었다.’라는 시구를 인용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렇다. 효(孝)자(字)를 파자(破字) 풀이하여 보면 부모가 나이 들어 힘이 없어지면 자식이 지팡이를 대신해서 부모를 업고 다닌다는 뜻이다. 그리 크게 철학적이거나 어려운 뜻이 아니다. 우리 민족은 예부터 효를 백행의 근본으로 생각해 왔고 또 그렇게 자식들에게 가르쳐 오고 실천해왔다. 실정법에 명문화되어 있지 않아도 서로가 잘 지켜오고 있는 것이 ‘효’였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효는 실정법 이전에 인간이 지켜야할 윤리도덕이요, 조리(條理)이자 경위(涇渭)였던 것이다. 이러한 효가 법에 의해 강제된다면 그것은 이미 자발성의 결여로 진정한 의미의 효가 아니다. 우리는 이를 효라 부를 수 없다. ‘효’가 며칠 전 ‘효행장려법’이라는 이름으로 국회를 통과했다. 반갑기에 앞서 자괴감을 느낀다. 어쩌다 우리는 효마저 입법화해야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는지. 아무튼 이번 효행법 제정이 사그라진 인성회복의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한동안 뜸하던 반 인륜범죄가 며칠 전 또 다시 저질러져 우리를 경악케 했다. 최근 회사 경영권을 빼앗으려는 한 패륜아가 저지른 ‘아버지 정신병원 감금 미수 사건’은 사회를 경악케 하고도 남음이 있는 사건이었다. 모두가 혀를 내둘렀다. 여기서 우리가 결코 지나칠 수 없는 것은 과거에 비해 이 끔직한 사건도 그저 신문 방송에서 1회성 보도로 지나가 버린다는 점이다. 어느 누구도 땅에 떨어진 인륜을 개탄하거나 이런 불효자를 엄벌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전 같으면 이 같은 패륜을 저지르는 사람이 있으면 법 이전에 마을 사람들이 ‘멍석말이’라 하여 집단 사형(私刑)을 가하고 동리 밖으로 내쫓았다. 지금은 언감생심, 말도 못 꺼낸다. 누가 부모를 막 대하든 내가 알 바 아니라 한다. 하기야 내 부모도 잘 모시지 못하는데 하물며 남의 부모에 이르러서랴. 우리의 이러한 효심의 상실이 이번 효행법 제정의 계기가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법에 의해 강제되는 효는 받들어 모시는 봉양(奉養)이 아니라 단순히 먹여 살리는 부양이다. 마땅히 해야 할 도리임에도 행하지 않으니까 법으로 강제해서라도 효를 실천토록 해야 함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한 아들이 노모로부터 매를 맞는데도 아프지 않자 어머니의 팔에서 힘이 빠진 것을 생각하고는 슬피 울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 효를 논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신라시대의 설화가 있다. 집이 가난한 손순이 노모의 음식을 어린 자식이 빼앗아 먹는 것을 보고 자식은 또 낳으면 된다 하여 아이를 밭으로 데려가 땅에 묻으려 하고 땅을 파니 하늘이 효심에 감복했는지 땅속에서 석종이 나와 자식도 살리고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 등등이 그것이다. 옛이야기는 이렇게 아름답다. 오늘 날은 어떠한가. 한 시골 농부가 자식을 교육시키기 위해 소 팔고 땅 팔아 서울에 있는 대학을 마치게 하고 결혼까지 시켰다. 서울에 사는 아들집에 시골 부모가 다니러 갔다. 며느리가 외식을 하자고 했다. 아들이 말하기를 “우리 어머니는 고기를 못 드시고 보리밥을 좋아하신다. 보리밥 집으로 가자.”고 했다. 이를 듣고 있던 노부모는 “우리도 고기 먹을 줄 아는데…”하며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는 이야기다. 자식 먹이고 공부시키느라 고기 한 번 먹어보지 못한 부모 마음을 알 턱이 없는 자식이었다. 이렇듯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의 차이는 천양지차이다. 오죽하면 부모가 자식 사랑하는 마음의 10분의 1만 가져도 효자 아닌 이가 없다고들 할까. 이 땅의 부모들은 말할 게다. 누가, 언제, 고기 사달라고 했느냐. 누가, 언제, 효도 받겠다고 했느냐고. 이러한 부모를 우리는 부모동의 없이 ‘효’라는 이름하에 ‘우리의 부모님’을 국회에 상정하는 행위를 한 것은 아닌지. 아무리 효행법이 제정됐다 해도 실정법에 구애됨이 없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효를 실천하기 바란다. 효는 올바른 심성에서 비롯돼야 진정한 효라 할 수 있다. 세상에는 좀 미루어도 되는 것이 있고, 지금 당장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있다. 효가 후자이다. 왜냐하면 세월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으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