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조 혜능이 15년간의 고행을 마치고 법성사에 이르렀을 때 바람이 불어 절 마당에 게양된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한 스님이 이를 보고 “저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는데 바람이 움직이는 것인가, 아니면 기가 움직이는 것인가?”하고 물으니 다른 한 스님이 “바람이 움직이는 것이다”라고 답했다. 또 다른 스님은 “아니다. 기가 움직이는 것이다”라며 옥신각신 다투고 있었다. 이를 중재라도 하려는 듯이 또 한 스님이 “바람과 기, 두 인연이 합쳐서 깃발이 움직이는 것이다.”라고 그럴듯하게 말했다. 듣고 있던 혜능이 나서며 “바람도 아니요, 깃발도 아니다. 흔들리는 것은 그대들의 마음이다”라고 말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는 일화가 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했다. 매사 오직 마음먹기에 달렸다. 승려들의 도박 파문으로 불교계가 야단법석이다. 부처님 오신 날인 초파일을 앞두고 구도자(求道者)의 길을 가는 일부 승려들의 본분을 망각한 행동이 드러나 불교계와 중생들을 허탈하게 하고 있다.
속세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계율을 지키지 못한 행동으로 물의를 빚은 것이다. 극기(克己)가 어렵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도(道)를 구하는 구도자들에게는 이겨내야 할 대상의 유혹들이다. 마음의 수양이 부족한 승려니 세속의 흐름에 휩쓸리게 되는 것이리라.
스님이란 말 속에는 우리의 정신적 스승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스승의 여러 어원 설 중 하나가 스님유래설이다. 스님이란 승(僧)이라는 말에서 따온 우리말이라고 하는 설이다. ‘승’이란 말에서 음차되어 스승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한다. 지금은 중생들로부터 존경받는 큰 스님, 큰 스승의 출현이 기다려지는 사회이기도 하다.
구도자의 경건한 자세에서 성(聖)스러움이 빛난다. 구도자의 길은 아무나 갈수 있는 길이 아니다. 세속의 욕망을 다 내려놓고 가야하는 길이기에 더더욱 범인들은 갈 수 없는 길이다.
논어 안연 편에 사물(四勿)의 교훈이 나온다. “예가 아니면 보지 말며, 예가 아니면 듣지 말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며,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가 그것이다. 세속의 가르침도 이랬다. 하물며 중생을 구제하고 도를 구한다는 수도자의 자세에 있어서랴. 세상의 지나가는 편경에 좌우되고 혹한다면 그것은 수도자의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다.
‘파사현정(破邪顯正)’이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교수들이 뽑은 2012년 희망의 문구이기도 하다. 그릇된 것을 깨뜨려 없애고 바른 것을 드러낸다는 의미의 불교용어다. 스스로의 몸가짐도 못하면서 어떻게 사악한 것을 쳐부수어 이 땅에 정의를 세우겠는가.
물욕은 수도자에 있어서는 금기다. 불문에서는 머리카락을 무명초라 부르고 세속적인 욕망의 상징으로 본다. 때문에 삭발은 속세에서 벗어나 출가하여 수행의 길을 간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머리털이 자라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수도승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끊임없이 솟아나는 세속의 욕망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불가에 삼독(三毒)이 있다. 탐욕, 분노, 어리석음, 즉 탐진치(貪瞋癡)가 바로 그것이다.
연일 스님들의 참회문과 함께 엎드려 절하는 사진이 신문지상에 보도되고 있다. 누가 무엇 때문에 누구를 향하여 허리 굽혀 절하는 것인가. 불교계의 자기 성찰이 요청되는 대목이다.
불가의 꽃이 연꽃인 이유는 시커먼 진흙 속에서도 영롱하게 피어나기 때문이다. 스님은 중생의 스승이다. 스승의 자세는 바르고 곧아야 한다. 도박에 술 담배 다해가며 언제 어느 천 년에 저 높은 깨달음의 세계에 이를 것인가.
흑백 시비를 가려달라며 세속의 법정에 심판을 청하고 있는 지경에까지 이른 불교계다. 갈수록 점입가경이다. 필자는 세상이 아무리 혼탁해져도 맑아야 할 부류가 있어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해왔다. 그곳은 종교계, 학계, 법조계가 그곳이다. 마지막 희망처마저 썩는다면 우리에게 앞날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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