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信義)가 없으면 존립할 수 없다(無信不立)/원현린 주필(主筆)/ 입력 2023.09.13
오늘은 제9회 법원의 날이다. 필자는 2015년 제1회 법원의 날을 전후해 "4월 25일 ‘법의 날’이 있는데 이 무슨 새삼 법원의 날인가?"라고 전제하고 법원의 날 제정 약사를 언급한 적이 있다. 당시에도 오늘날처럼 법조비리가 터지지 않는 날이 없을 정도였다. 해서 나는 삼수변에 해치 치, 갈 거자로 구성된 옛 법자의 뜻풀이를 해 가며 "이 법 글자에서 자유로울 법관이 그 몇이나 될까. … 법이라는 글자 한 자에 부끄러움을 느껴야 하는 우리 법조계다"라고 사법부를 비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랜 시일이 지난 현재까지도 왕왕 터지는 법관 비리는 우리를 허탈하게 한다. 조금도 달라진 곳이 없다.
신뢰의 문제다. 한번 실추된 믿음을 다시 구축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정치에 대한 불신은 으레 그렇다치더라도 ‘사법부 너마저!’ 소리는 듣지 않아야 되지 않겠는가. 법원은 ‘인권 최후의 보루’라고 일컬어지는 기구다. 시급히 무너진 신뢰 회복에 나서야 하겠다.
이균용 대법원장 후보자도 지명 이후 첫 출근길 간담회에서 "구성원 전체가 힘을 합쳐야 한다"며 사법부 통합을 강조하고, "사법부가 본연 기능에 충실해 국민에게 신뢰를 받을 수 있느냐가 시급하다"며 불신을 받는 사법부의 현주소를 인정했다.
시민들의 사법 불신은 이미 오래됐다. 법원 권위는 추락할 대로 추락했다.
무신불립(無信不立)이라 했다. 사람은 신의가 없이는 설 수 없다. 자공(子貢)이 정사(政事)를 묻자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양식과 병(兵)을 풍족히 하면 백성들이 믿을 것이다." 자공이 말했다. "부득이 버려야 한다면 이 세 가지 가운데 무엇이 먼저입니까?" 공자는 "병을 버려야 하느니라." 자공이 또 말했다. "반드시 부득이 버려야 한다면 이 두 가지 가운데에서 무엇이 먼저입니까?" 하자 이르기를 "양식을 버려야 하느니라. 예로부터 사람은 누구나 죽음이 있거니와, 백성에게 신의가 없으면 존립할 수 없느니라(民無信不立)."
그렇다. 믿음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법에 대한 불신은 나라마저 병들게 하고 종국에는 망국에 이르게 한다.
중국 전국시대에 위(衛)나라에서 진(秦)나라로 가서 자기 학술을 밝힌 상앙이라는 법가(法家)사상가이자 정치가가 있다. 당시 백성들이 법을 지키지 않는 모습을 보고 상앙은 "법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는 까닭은 위에서부터 이것을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法之不行自上征之)"라고 했다. 사마천(司馬遷)은 "상앙의 부국강병책(富國强兵策)에 의해 진의 효공(孝公)은 천하의 패자(覇者)가 됐고 후세에 그의 법은 모범이 됐다"고 서술했다.
오늘날 우리 국회처럼 스스로 법을 만들고 스스로 지키지 않는 모습에서 준법정신 실종을 본다. 말 그대로 모순(矛盾)이 아닐 수 없다.
정가(政街)에는 비황(飛蝗)의 무리들로 차고 넘친다. 일부이긴 하겠지만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는 법관들마저 정치진영 논리에 따라 이리 휩쓸리고 저리 휩쓸린다면 우리의 사법정의는 요원하다 하겠다.
우리는 사법부를 일러 ‘인권 최후의 보루’라고 추켜세운다. 법원이 이러한 명성에 부응하려면 철저한 자기혁신을 전제로 할 때만이 가능하다. 믿도록 해야 한다. 언제까지 후회와 반성만을 반복할 수는 없다.
법관에 대한 불신이 고황에 든 지 오래다. 웬만한 노력으로는 치료가 어렵다. 그래도 국민의 신뢰를 얻도록 노력해야 한다. 국민이 신뢰할 때만이 법원은 새로 날 수 있다.
그렇다. 무너지고 실추된 신뢰 회복이 급선무다. 흠집난 곳을 일부 수선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오랫동안 썩고 곪은 곳을 도려내야 새살이 돋아난다. 지금 엉망이 돼 버린 사법부다.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 몫이다.
이제 말뿐인 ‘정의(正義)의 설파’는 공허한 외침으로 들린 지 오래다. 그래도 필자는 기회 있을 때마다 법관들에게 "법관들은 ‘법의 정신’을 잠시도 잊으면 안 된다"고 강조하곤 한다.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우라"는 저 거창한 정언명령(定言命令)까지는 아니더라도. 모쪼록 법원의 날을 맞아 법관을 비롯한 법조인들이 일신 우일신(日新 又日新), 거듭거듭 새로 나는 모습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