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현린 칼럼

어린이가 있기에 미래가 있다

원기자 2012. 10. 3. 16:05

어린이가 있기에 미래가 있다
2008년 11월 26일 (수) 인천신문 i-today@i-today.co.kr
어린이를 극찬하여 노래한 시문은 많다. 우리에게 ‘동방의 등불’이란 시를 남겨 잘 알려진 인도의 시성 타고르는 일생동안 변함없는 애정의 눈으로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어린이를 성숙하지 않은 어른으로 보지 않고 가장 순수하고 완성된 하나의 독립적 존재로 보았다. 이 시인은 ‘바닷가에서’라는 시에서 ‘아득한 나라 바닷가에 아이들이 모였습니다.… 모래성 쌓는 아이, 조개껍데기 줍는 아이, 마른 나뭇잎으로 배를 접어 한 바다로 보내는 아이, 모두 바닷가에서 재미나게 놉니다. 그들은 모릅니다. 헤엄칠 줄도,… 그물 던져 고기잡이 할 줄도 모릅니다. … 아득한 나라 바닷가는 아이들의 큰 놀이터입니다’라고 읊고 있다. 그리곤 어린이를 표현하기를 “어린이는 신이 인간에 대해 절망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이 땅에 보낸 사신”이라했다.


영국의 계관시인 워즈워드는 ‘하늘의 무지개를 바라보면 내 가슴은 뛰노라’로 시작되는 그의 시 ‘무지개’에서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고 노래하고 있다.


이렇게 아름다운 시문과 이야기의 대상인 어린이가 버려지고 매를 맞고 학대당하고 있다 한다. 가히 충격적인 뉴스가 아닐 수 없다. 어린이는 귀하고 귀한 우리 아이들이고 장차 이 나라의 주인공들이다. 한창 자라나야 할 어린이들이다. 모든 어린이는 잘 먹고 잘 자라야한다.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국민소득 2만 달러라는 나라에서 아이들이 버림받고 학대받는 그늘진 곳이 잔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어린이가 잘못한 것은 어느 것 하나 없다. 모두가 어른들의 책임이다. 사회와 국가의 책임이다. 잘 입히고 잘 먹이지는 못할망정 때리고 버리고 학대한대서야 말이 되는가. 언어도단이다.


다음은 첫 번째 어린이 날 전단지에 게재돼 뿌려진 내용 중 일부이다. ▲어린이는 어른보다 한 시대 더 새로운 사람입니다. 어린이 뜻을 가볍게 보지 마십시오. ▲싹을 위하는 나무는 잘 커가고 싹을 짓밟는 나무는 죽어 버립니다. ▲우리들의 희망은 오직 한 가지 어린이를 잘 키우는 데 있습니다. ▲희망을 위하여, 내일을 위하여, 다 같이 어린이를 잘 키웁시다.


줄지 않고 있는 인천지역의 아동 학대 사례를 보면 방임이 가장 많고 다음으로 신체·정서적 학대라 한다.


어려울 때일수록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나야 한다. 왜냐하면 어린이는 우리의 미래의 꿈이요 희망이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가 처한 경제적 어려움이 어린이를 집밖으로 내몰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안 된다. 그것은 죄악이다. 인성교육이 결여된 잘못된 교육 정책의 결과이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물질만능이 불러온 부작용이다. 훗날 지금 버림받은 아이들이 부쩍 자랐을 때 무슨 낯빛으로 이들을 대 할 것인가.


날씨도 추워지고 있다. 오갈 곳 없는 아이들이 생활하고 있는 고아원 등 시설원들의 겨울나기가 걱정이라고들 한다. 겨울나기 김장이 한창이다. 그 싸다는 배추가 없어 김장도 넉넉히 담글 수 없다. 예전에 비해 독지가의 발길이 뜸해졌기 때문이다.


어린이가 어떻게 자라고 있느냐에 따라 그 나라의 미래가 결정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비난을 받으며 자라난 아이는 남을 헐뜯는 사람이 되고 미움을 받고 자란 아이는 싸움 잘하는 사람으로 성장한다. 반대로 격려와 칭찬을 받고 자란 아이는 범사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으로 성장한다.


영국의 사회사상가 존 러스킨이 “순진함과 모든 완전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어린이들이 끊임없이 태어나지 않는다면, 세계는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으로 변했을까”라고 표현했듯이 우리에게는 어린이가 있기에 미래가 있는 것이다.


버려진 아이는 올바르게 자라기 어렵다. 교육을 받을 기회를 잃기 때문이다. 자칫 성격이 빗나가기 쉽다.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우리 모두 공동의 책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