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오랑캐 문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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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이다. 농부는 들녘의 곡식을 안으로 거둬들인다. 천자문에 나오는 말 그대로 추수동장(秋收冬藏)이다. 예부터 밤 대추와 감이 익어갈 무렵이면 동네 의원이 굶어 죽는다 했다. 그만큼 가을에는 들과 산에 먹을 것이 많다는 뜻일 게다. 수확의 계절이니 적어도 가을에만은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는다는 얘기다. 배고픈 설움을 겪어온 민족의 슬픈 이야기다. 그래서 비용이 꽤나 들어가는 자녀의 혼삿날도 모든 것이 풍성한 이때 많이들 잡았다. 결혼시즌이다. 결혼은 시의 고금과 양의 동서를 막론하고 인륜지대사이다. 우리는 이렇듯 중차대한 대사가 단지 재물에 의해 망치는 경우를 흔히 본다. 며칠 전 한 잡지에서 혼수가 적다는 이유로 결혼생활이 파경에 이르는 예를 보았다. 옛말에 가난이 문틈으로 들어오면 사랑은 대문을 열고 나간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재물 때문에 결혼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의외로 많다고들 한다. 이혼율 증가 소식은 이제 새삼스러운 뉴스거리가 아니다. 늘어나는 중년이혼의 사유로는 경제문제가 가장 많다고 한다. 필자는 지난 일요일에 두 곳의 결혼식장에 다녀왔다. 이날도 식장에서는 예외 없이 다음과 같은 의식절차에 따라 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주례는 먼저 ‘신랑 아무개 군과 신부 아무개 양은 어떠한 경우라도 항시 사랑하고 존중하며 어른을 공경하고, 진실한 남편과 아내로서 도리를 다 할 것을 맹세합니까?’하고 묻고는 ‘예!’라는 답을 얻어내 혼인서약을 했다. 다음으로 ‘이제 신랑과 신부는 일가친척, 친지를 모신 자리에서 일생동안 고락을 함께할 부부가 되기를 굳게 맹세를 하였습니다. 이에 주례는 이 혼인이 원만하게 이루어진 것을 여러분 앞에 엄숙하게 선언합니다.’ 하고 성혼선언을 했다. 이렇게 혼인식이 거행되는 동안은 신랑신부는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헤어지거나 파경에 이르지 않을 것이라는 다짐을 마음 속 깊이 아로새기며 서로에게 맹세한다. 사랑을 확인하고 하객들에게도 오늘의 혼인서약을 지킬 것을 약속한다. 때문에 이 순간만은 엄숙하게 진행된다. 하객들도 숨을 죽인다. 여기서 ‘아니오’라고 답하는 신랑신부를 필자는 지금까지 보질 못했다. 이제는 아무리 명 주례라 하더라도 더 이상 이 같은 시원한 답을 유도해내지 못할 것 같다. 혼인을 전후, 예물로 인한 다툼이 주위에서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 심한 경우 혼수와 결혼 지참금의 많고 적음을 문제 삼아 파혼하거나 이혼하는 등의 사례가 왕왕 있다. 빠른 경우 성혼선언문의 잉크도 마르기 전에 살아보지도 않고 신혼여행지에서 다투다가 헤어지는 경우도 있다. 이들에게 어떠한 난관도 헤쳐 나가겠다던 혼인서약 맹세 따위는 휴지조각이다. 앞으로는 주례사의 내용도 바뀌어야할 것 같다. 예외 없이 신랑신부를 향하여 던져지던 질문도 이제는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백년가약’이라던가 ‘검은머리 파뿌리 되도록’, ‘슬플 때나 기쁠 때나.’, ‘백년해로’등은 이미 낡은 고어가 된 지 오래다. 결혼의 신중성을 강조하는 말로 ‘거친 바다에 나갈 때는 한번 기도하라. 전장에 나갈 때는 두 번 기도 하라. 결혼할 때는 세 번 기도하라.’는 서양의 속담이 있다. 문중자로 불리는 중국 수나라 유학자 왕통은 말하기를 “결혼을 하면서 재물을 이야기하는 것은 변방의 오랑캐들이나 하는 짓이다. 군자는 그와 같은 풍습이 있는 고을에 들어가지 않는다. 옛날에는 남자와 여자의 족속이 각각 그 덕성을 택했을 뿐, 재물을 보내는 것으로 예를 삼지 않았다”고 했다. 그토록 아름답던 우리의 결혼풍습이 부지불식간에 오랑캐 문화에 의해 점령당한 듯하다. 국민소득이 아무리 높아도 혼인을 앞두고 재물을 이야기하는 한 우리는 결코 문화민족이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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