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현린 칼럼

인성법복(人性法服)

원기자 2012. 10. 3. 16:09

인성법복(人性法服)
2008년 12월 17일 (수) 인천신문 i-today@i-today.co.kr
지금까지는 법관에 임용되려면 사법시험 성적이 우수하고 사법연수원 성적이 좋아야 했다. 그래야 우선적으로 판사에 임용될 수 있었다. 앞으로는 판사를 뽑을 때 인성도 보겠다고 한다. 법관에게 더 높은 인격과 도덕성을 갖출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법관은 신은 아니더라도 그에 가까워야 한다. 자칫 오판이라도 하게 되면 되돌릴 수 없는 우를 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형의 경우 한 번 집행되면 회복은 영원히 불가능하다.


법관은 법정에서 법복을 입는다. 게다가 한 단계 높은 곳에 앉는다. 같은 시험을 통과하고 같은 법조인이지만 검사나 변호사로부터의 예우도 깍듯하다. 재판 도중에 발언할 때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하고 진술을 시작한다. 이처럼 존경과 추앙을 받는 이유는 보통시민과 다르기 때문이고 다르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손으로 신(神)을 뽑을 수는 없다. 법관에 이르러서는 인간이 신이 아니더라도 완벽에 가까운 신인(神人)이기를 요한다. 완전무결에 가까운 판관을 뽑으려는 것이 우리의 이상이다. 판사석은 아무나 앉는 자리가 아니다.


법관의 선발은 엄격하고 까다로워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법관도 보통사람이다. 그들도 똑같은 사람인데 사회가 신격화시켰는지 모른다. 제도상 재판이라는 업무를 맡겨놓고 그에게 완벽을 요구하는 것이다.


얼마 전 재판부가 과거의 잘못된 재판을 진심으로 반성한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 공안정국시절의 재심사건을 다룬 한 재판에서 재판장은 “그동안 억울한 옥살이로 인한 심적 고통을 주고, 사법부에 대한 기대를 무너뜨린 데 대해 이 자리를 빌려 사죄드립니다”라고 전제하고 “이번 사건을 계기로 어떠한 정치권력의 간섭을 받지 않고 오로지 국민의 자유와 재산을 보호하는 책무에 충실하겠습니다. 앞으로 재판부는 좌로도, 우로도 흐르지 않는 보편적 정의를 추구하겠습니다.”라고 반성한 것이 그것이다. 지나간 시절 사법부의 한쪽에 치우친 재판이 없지 않았음을 시인한 것이다.


우리 헌법에는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법관의 양심이란 법관 개인의 자의적 판단이 아니라 조리(條理)와 경위(涇渭)에 맞는 보편적 정의에 입각한 양심을 의미한다 하겠다.


일부 변호사들이 판·검사 재직당시의 사건 수임을 맡아 왕왕 논란이 되곤 한다. 법조인의 양심을 하루아침에 저버리는 것이다. 그러한 변호사가 재직 시에 양심에 따른 재판을 했거나 수사를 했을 리 만무하다. 이러한 경우 재직당시의 독직 여부를 가릴 필요도 있다 하겠다.


애초에 우리에게 낯선 ‘노블레스 오블리제’인지 모른다. 우리는 우리 사회의 신분 높은 이들에겐 실천 가능하지도 않고 어울리지도 않는 것을 가지고 지키라고 요구해오고 있다. ‘고위층 아들 병역 기피’, ‘의사가 허위 진단서 발급’, ‘전직 판·검사 시절의 사건 수임, 거액 챙겨’ 등등의 일이 비일비재한 나라가 우리나라이다.


현대의 법률사건은 복잡다기하다. 얽히고 설킨 사건들을 명료하게 풀어줄 판사가 필요하다. 최종심에서 아무리 무죄 판결이 나 전심 재판부의 법관이 사죄한들 이미 집안은 풍비박산 나고 지인들은 떠난 후다. 몸도 망가지고 영혼도 피폐해졌을 텐데, 사후에 아무리 머리 숙여 사죄한들 아무 소용이 없다. 오판은 이만큼 무서운 것이다. 되돌릴 수 없는 과오를 저지르는 것이다.


정의(正義)는 바로 서야 한다. 각자가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할 때 정의는 이루어진다 했다. 필자는 지나간 칼럼을 통하여 법관이라면 ‘법복의 무게’를 알라고 했다. 인격적으로 완성된 법조인이 판사자리에 앉아야 한다.


법원행정처가 판사 선발시에 인성평가를 강화한다는 방침을 정하고 ‘법관 인성평가 방안’에 대한 연구 과제를 공모했다. 늦은 감이 있으나 다행이다. ‘인성법복(人性法服)’을 입은 새로운 법관의 출현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