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현린 칼럼

위대한 유산

원기자 2012. 10. 3. 16:21

위대한 유산
2009년 02월 25일 (수) 인천신문 i-today@i-today.co.kr
며칠 전 선종한 김수환 추기경은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김 추기경의 묘비명으로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라는 문구가 새겨질 것이라 한다.


종교계 한 지도자의 타계를 계기로 많은 시민들이 삶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기고 있다. 안구와 장기 기증을 희망하는 시민이 늘어나는 등 ‘사랑’ 운동이 온 나라에 걸쳐 번지고 있다. ‘참살이’를 의미하는 ‘웰-빙’ 못지않게 ‘잘 죽는 것’, 즉 ‘웰-다잉’도 중요한 것임을 시민들은 뒤늦게 깨닫고 있는 것이다.


언제나 “공부하다 죽어라”라고 가르친 성철스님은 열반송에서 “한 평생 무수한 사람들을 속였으니 그 죄업이 하늘에 가득 차 수미산 보다 더하다”라는 말을 남겼다. 일평생 깨끗하게 살다가는 수도자도 그 죄업이 하늘에 닿는다 했다. 중생을 대신하여 한 말일 게다.


이들 지도자가 남긴 경구는 불에 타지도 않을 뿐더러 물에 젖지도 않는다. 우리의 유산이 되어 대대손손 전해진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물려받은 진정한 위대한 유산이 아닌가 한다.


우리에게 어른이 없다고 한다. 대중은 특히 가치관이 정립돼 있지 않고 사회가 혼란스러울 때 더욱 우리를 인도하고 이끌어줄 진정한 지도자의 출현을 갈구한다. 우리의 기억으로부터 사라지기 때문에 없는 것이다. 위대한 스승들은 얼마든지 있다.


떠나면서까지 거짓말 하는 사람은 없다. 한 인물의 마지막 말인 유언과 묘비명엔 꾸밈과 가식이 없다. 평생의 철학과 소원, 바람이 담기기 마련이다. 문구에 따라 세인들에게 교훈을 주고 감동을 일으키기도 한다. 잘못된 스스로 삶에 대한 반성의 계기가 되기도 한다.


필자가 처음으로 접한 비문은 비판철학으로 잘 알려진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묘비명이다. 그의 묘비에는 “나에게 항상 무한한 경탄과 존경심을 일으키게 하는 두 가지. 그 하나는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과 다른 하나는 내 마음속의 도덕률”이라는 실천이성비판의 마지막 구절이 새겨져 있다. 우리는 ‘칸트 이전의 철학은 칸트에로, 칸트 이후의 철학은 칸트로부터’라고 하여 칸트를 ‘철학의 호수’라 칭하기도 한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온 그가 후회 없는 삶을 살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임종 시에 “이것으로 족하다(Es ist gut)”라는 마지막 말을 남긴 것으로 전해진다.


영국의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의 묘비명인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라는 문구도 자주 인용되고 회자된다. 이는 하루하루를 성실히 채워 후회를 남기지 말라는 교훈이 들어 있다. 기행으로 유명한 중광스님의 경우는 “괜히 왔다간다”이다.


이처럼 유언이나 묘비명들은 세상을 향해 건네는 마지막 말인 것이다. 모두 진실된 표현들로 믿어도 괜찮을 성 싶다.


선비와 시인들도 세상을 떠나기 전에 절명시를 남겼다. 단종복위를 도모하다가 미수에 그쳐 사형을 당한 성삼문은 “둥둥둥 북소리 사람의 목숨을 재촉하고, 고개 돌려 보니 해는 서산으로 지는구나. 황천 가는 곳 주막 하나 없으니, 오늘 밤은 누구 집에서 잘 것인가.”라는 절명시를 남겼다.


한말 황현은 한일합방으로 나라가 망하자 지식인으로 절개를 지키기 위해 “새와 짐승들도 슬피 울고 바다 또한 찡그리니, 무궁화 이 나라가 이미 물속으로 가라앉네. 가을의 등불 아래 책을 덮고 지난 역사를 되새기니, 어렵구나! 지식인의 사람다움을 지키기가.”라는 절명시를 남기고 자결했다.


회한으로 점철된 삶을 산 사람은 생을 마감할 때 한이 맺힌 유언을 남긴다. 하지만 인생을 후회 없이 알차고 성실하게 산 사람은 미소 지으며 떠난다.


이제 차분히 자신을 돌아보고 ‘나는 과연 건전한가’라고 스스로를 향해 자문해볼 때가 아닌가 한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라던가, “괜히 왔다간다”라고 후회하지 말고 “이것으로 족하다”라는 말을 남기기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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